본문 바로가기
일상/불친절한 감상자

책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by 여름햇살 2018. 8. 5.
반응형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국내도서
저자 : 알렉산드르 이자에비치 솔제니친(Aleksandr Isaevich Solzhenitsin) / 이영의역
출판 : 민음사 2000.04.30
상세보기



독서 모임 선정 도서로 읽게 된 책이다. 나는 고전은 흥미로워 보이는 책만 골라 읽는 펴느로, 즉 다시 말해 거의 읽지 않는다(!). 이 책은 '고전문학 읽은 척 매뉴얼'과 '청춘의 독서' 에서 언급된 책이라 제목도 알고 있었고 실제로 읽고도 싶다고 생각을 했던 책이었다. 그러나 나의 게으른 성격으로 책 읽기를 하루 이틀 미루다가 이렇게 우연히 강제로(?) 읽게 되었다. 7월은 게으름을 피우느라, 이 얇은 책을 독서 모임 당일까지 완독하지 않아 좀 아쉬웠다.(읽기만 해도 수감생활을 하는 기분이라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지만 말이다)


이 책은 솔제니친이 스탈린 시대에서 억울하게 수용소 생활을 한 이후에 쓰여진 책이다. 주인공 슈호프의 수용소 안의 비참한 삶의 하루를 그려내며, 현실을 고발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러시아 혁명과 그 시대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상태로 글을 읽었다면 러시아의 역사에 비추어 해석을 했을테인데, 무지한 나라서 역사와는 상관없는 개인적인 감상만 남았다. 


첫째가 나는 수감생활을 잘 견딜 수 있었을까이다. 책에서 나오는 수감생활은 비참하기 그지 없다. 허기를 면할 수 없을 정도의 터무니없는 음식들, 그리고 당장 죽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추위, 그리고 그 속에서 해야 하는 노동의 양. 이런 수용소의 생활의 묘사를 읽으며 내가 슈호프였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생각보다 나는 수용소의 생활을 잘 버텼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의 이런 말에 독서 모임 사람들은 슈호프가 여기에 있었다며 장난을 쳤다. 하지만 그 당시의 나는 책을 완독하지 않아 슈호프가 어떤 캐릭터인지 파악을 하지 못해 기다 아니다 라고 말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다 읽은 지금에서는 슈호프와 나는 다른 이유로 수용소의 생활을 잘 보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주어진 상황이 어떠하건 그냥 잘 견디는 편이다. 어떤 상황이나 조건이 마음에 들건 안들건 묵묵히 살아간다(?)는 의미에서 나는 수용소 생활을 잘 했을 것이다. 정해진 시간에 해야 할 일이 있고,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는 규칙 생활에 매우 잘 적응하는 나의 모습을 책을 읽으며 다시 한 번 확인해보았다. (이 말에 내 남자친구는 알면 알수록 군대 체질이라고 또 한 번 감탄을.... 아놔) 


두번째는 슈호프의 생각을 보며 삶의 이유나 목적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슈호프에게 미래란 없다. 슈호프의 아내는 가끔씩 슈호프가 수용되기 이전과 달라진 사회의 모습을 편지로 전했다. 8년이라는 시간을 수용소에서 보낸 슈호프에게는 그 변화가 낯설기만 했다. 슈호프의 아내는 슈호프에게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카펫 염색에 대해 알려주며, 슈호프가 돌아온다면 그 일로 많은 돈을 벌자고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슈호프에게는 약속된 미래가 없다. 하루하루 살아갈 뿐, 먼 훗날의 미래에 대해서는 기대하는 바가 없는 신기루일 따름이다. 


기약된 미래가 없다라, 그렇다면 왜 슈호프는 이 비참한 삶을 끝내지 않는 것일까 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인간은 보통 참기 힘든 오늘을 희망찬 미래에 대한 상상을 진통제삼아 버텨 나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누구보다 그 진통제가 필요할 것 같은 슈호프는 미래에 대해 희망을 가지지 않는다. 선고된 형량을 채운 뒤에도 나갈 수 없을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만이 있는 그였다. 더 나아질 희망이 없는 상태에서 그는 왜 굳이 지금의 비참함을 견디는 것일까. 책을 읽다보면 슈호프는 작은 일 하나하나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눈을 속여 야채죽을 한 그릇 더 빼돌린다던지, 질 좋은 담배를 구입하게 되었다던지, 연장을 몰래 수용소로 가지고 왔다던지 등등의 아주 작은 일로 즐거워하고 있다. 조금은 비굴해 보일 수도 있는 그의 태도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삶의 지혜를 배웠다.

 

우리의 행복은 기약된 미래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었다. 기약되었다고 한들 그 미래에 당도했을 때에는 그게 나의 현재가 될지 안될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대신 지금 당장 현재는 나의 일이고, 손에 잡히는 현재만이 실재이다. 지금 현재에 만족하는 일, 그 것이 우리가 지금 바로 여기에서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원하는 것이 이루어 져서 좋은 것도 아니고,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나쁜 것이 아닌, 좋은 일들만 이루어진 삶이 좋은 것이 아니라 좋은 일도 겪고 나쁜 일도 겪고 그저 살아 있다는 것이 좋은 삶이라는 그 깨달음을 솔제니친은 수용소에서 배웠던 것은 아닐까 추측해보았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억울하게 수감된 슈호프의 삶을 부인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의 부조리는 맞서 싸우되, 그와 함께 지금의 나는 행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슈호프와 다른 수감자들의 비참한 삶을 보며 이들을 수감시킨 타인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들은 그들의 욕망의 확장을 위해 이들을 수용소로 보냈고, 그들의 욕망이 확장된만큼 수감자들의 욕망(자유)이 축소되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세상에서는 충족될 수 있는 욕망의 크기는 한정되어있고, 인간이란 그 한정된 욕망의 파이를 서로 더 많이 갖기 위한 투쟁으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의 욕망은 확실하게도 '돈'이다. 반세기가 지난 시점에서 이 책이 그리고 있는 부조리한 사회가 개선되었냐 묻는다면 '합리적인 사회 합의' 라는 명목하에 그 부조리는 지속되고 있다고 감히 말해본다. 나의 편의를 위해  생활이 불가능한 최저 임금으로 타인을 노동을 시키며 반강제적으로 수용소의 삶을 살게 하고 있다. 부조리하다는 것은 알지만 먹이 사슬에서 조금 위에 있다는 것에 안심하며 부조리를 암묵적으로 동조할 뿐이다.


그래서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를 생각했다. 나의 욕망을 위해 타인의 욕망을 축소 시키는 삶을 살 것인지, 아니면 타인의 욕망을 위해 내 욕망을 축소 시키는 삶을 살 것인지, 그도 아니면 제 3의 안은 있는지 말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 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는 시기라 어떤 텍스트를 읽어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주제를 뽑아내게 된다. 


이래서 책이 재밌다. 나의 현 시점의 생각에 따라 텍스트가 다르게 해석된다. 다음 번 다른 마음으로 읽게 되면 어떻게 해석될지 궁금해진다. 읽고 싶은 책이 많아 몇년 이내에 다시 읽을 것 같지는 않지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