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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불친절한 감상자

책 셰릴 스트레이드 와일드

by 여름햇살 2020. 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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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 마지막 장을 읽었다. 저자인 셰릴 스트레이드가 인생이 바닥으로 내몰렸다고 생각했을 때 기나긴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를 무거운 배낭(몬스터)를 짊어지고 홀로 걸으며 겪고 느낀 것에 대한 에세이다. 이 책이 나온 2012년에 저자를 쿨하다고 생각했고, 꼭 읽고 싶었으나 두꺼워보여 미루다가 존재를 까먹었다. 그러다 요즘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 그리고 그 생각의 절박함이 강해졌고 이 책이 생각나게 되었다. PCT를 걸으면 인생이 혹은 스스로가 변할 것이라고 믿었던(하지만 장담할 수 없는) 셰릴의 마음처럼, 나 또한 그렇게 책을 읽어내려가게 되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더욱 엉망이었던 셰릴의 과거는, 책을 읽으면 읽을 수록 끔찍했다. 공포영화의 끔찍이 아니라, 그 어린 나이에 그러한 삶을 겪어내야 했던 그녀의 인생이 참담했단 이야기다. 타인인 나보다 그녀는 얼마나 더 절박했을까, 상처뿐인 과거를 뒤로하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힘을.

발톱이 빠지고, 탈수증에 쓰러지고, 잃어버린 등산화(너무 작아 발에 고통만 주긴 했지만)덕에 샌들에 테이프를 칭칭 감고 계속해서 걸어나가야 했지만 그녀는 결국 그 머나먼 길, 4285km를 걸어내고야 말았다. 그녀의 책을 따라 함께 걸으며, 그녀가 마지막 장소인 컬럼비아 강의 다리에 도착했을때에는 ‘울고 싶었지만 울지 않았던’ 그녀 대신에 내가 울었다.

와일드를 읽으며 생각했다. 다시 시작 할 수 있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새로운 시작은 그 이전의 과거의 종결을 의미한다. 인생은 게임과는 달라서 언제든지 reset 버튼을 누르며 새로 시작할 수 없다. 부인하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삶이었다고 할지언정, 그에 따른 결과를 핑계없이 온전히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 그 것이 성숙한 종결이다. 그렇게 종결한 다음에야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다.

PCT를 처음 시작했을 때의 그녀는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자신의 과거를 온전히 버릴 수 없는 상태였다. 조금만 힘든 상황이 나타나면 과거의 삶을 떠올렸고, 도망가고 싶어했으며, 자신의 현재가 자신 스스로의 문제가 아닌 외부에서 유래했다고 한탄을 했을 뿐이다. 그랬던 그녀는 힘든 트레일 과정속에 자신의 지난 삶에서 엄마의 과거까지 이해하고 포용하게 되었고 그렇게 끝까지 도보여행을 지속할 수 있었다. 그렇게 힘든 일을 온전히 스스로의 힘으로 종결한 끈기와 노력, 그 힘이 새로운 그리고 그녀가 원하던 삶을 시작 할 수 있게 했다.

그러면서 나의 지난 과거를 돌아보았다. 항상 새롭게 뭔가를 시작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시작한 일들을 제대로 끝맺은 적이 있던가 하고 돌이켜보니 그렇게 많지 않았다. 이유는 항상 다양했다. 처음 시작할 때 충만했던 의지와 열정이 사그라들어 지지부진했던 적도 있었고, 막상 계획할 때보다 더 힘들게 느껴져서 그만둔 적도 많았다. 종결한적이 없다는 말은 지속해내는 힘이 약하다는 말인 것이고, 지속하지 못했으니 결과물도 남지 않았다. 결과물만 없으면 좋을텐데, 이 일이 반복되니 자괴감만 깊어졌다. 나는 왜 이럴까.

올 한해가 시작하면서 여느 때 처럼 희망차고 새로운 시작을 다짐했다. 그래서 2020년의 1월의 마지막인 지금 나는 어떠했나 돌아보니 2019년의 12월에서 조금도 달라지고 나아진 것이 없다. 항상 마음만 먹고 지속하진 않는다. 어쩌면, 아니 확실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시작이 아니라 지속되고 있는 문제들의 종결이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 벌여놓은 것들의 마무리를 잘 하는 마음가짐으로 한 해를 살아야겠다.

+

책의 마지막 페이지 구절이 참 가슴에 와닿는다.

이제는 더이상 텅 빈 손을 휘저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고 저 수면 아래를 헤엄치는 물고기를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의 인생처럼 나의 삶도 신비로우면서도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고귀한 것이었다. 지금 이 순간, 바로 내 곁에 있는 바로 그것.

인생이란 얼마나 예측 불허의 것인가. 그러니 흘러가는 대로, 그대로 내버려둘 수밖에.

 

와일드
국내도서
저자 : 셰릴 스트레이드(Cheryl Strayed) / 우진하역
출판 : 나무의철학 2012.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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