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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불친절한 감상자

책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by 여름햇살 2019.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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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 하는 건 나의 일이었다. -P201

 

사랑이란 단어를 이토록 로맨틱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은 두 번 진행된다. 처음에는 서로 고립된 점의 우연으로, 그다음에는 그 우연들을 연결한 선의 이야기로. 우리는 점의 인생을 살고 난 뒤에 그걸 선의 인생으로 회상한다. -P177

 

물질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매순간 다른 존재이다. 시시각각으로 내 몸의 세포는 바뀌고 있으며, 10년이면 그 이전과 완전히 다른 세포들로 몸을 이룬다. 그러니 우리는 다른 존재로써 매 순간을 맞이한다. 우리는 그렇게 점과 같은 우리의 순간을 선으로 연결한다. 이야기를 만들고 개연성을 갖춘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개인의 역사'로 생각하는 일들을 떠올려보면 새삼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 심연이 존재합니다. 그 심연을 뛰어넘지 않고서는 타인의 본심에 가닿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날개가 필요한 것이죠. 중요한 건 우리가 결코 이 날개를 가질 수 없다는 점입니다. 날개는 꿈과 같은 것입니다. 타인의 마음을 안다는 것 역시 그와 같아요. 꿈과 같은 일이라 네 마음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야 하나도 어렵지 않지만, 결국에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방법은 없습니다. 그럼 날개는 왜 존재하는 것인가? 그 이유를 잘 알아야만 합니다. 날개는 우리가 하늘을 날 수 있는 길은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날개가 없었다면, 하늘을 난다는 생각조차 못했을 테니까요. 하늘을 날 수 없다는 생각도 못했을 테지요. -P241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심연이 존재한다. 깊고 어둡고 서늘한 심연이다. 살아오면서 여러 번 그 심연 앞에서 주춤거렸다. 심연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건너갈 수 없다."
희망은 날개 달린 것, 심연을 건너 가는 것, 우리가 두 손을 맞잡거나 포옹하는 것, 혹은 당신이 내 소설을 읽는 것, 심연 속으로 떨어진 내 말들에 귀를 기울이는 것. 
-작가의 말

 

각자는  점의 사건들을 선의 이야기로 만들고, 그 이야기를 타인에게 전달한다. 글을 읽으며 점과 점 사이에도 심연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럼 그 점들로 이루어진 선과 선의 사이에는 얼마나 더 깊은 심연이 존재할까. 우리는 결코 죽을때까지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 명백한 사실에도 우리는 사랑이라는 힘으로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관계에서 오는 감동을 눈물나게 아름답게 표현한 소설이다.

 

소설가의 일에서 보면 김연수 작가가 불교 철학에 관심이 많아 보였는데, 연기론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었던 것이 느껴진다. 연기론을 잘 표현하는 말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此有故彼有),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기며(此起故彼起),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도 없고(此無故彼無), 이것이 없어지므로 저것도 없어진다(此滅故彼滅)" 이다. 이 것은 결국 관계에 관한 이야기이다. 삶의 어려움이 없을 때에는 문제가 없지만, 살면서 그런 순간은 거의 없다. 고뇌와 번뇌의 연속이다. 그 순간에 우리가 괴로운 것은 현재의 번뇌의 원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원인을 모르니 해결을 할 수가 없을 수 밖에. (꽤 많은 사람들이 원인은 알지만 해결을 못할 뿐이야 라고도 하는데 사실 그건 진짜 원인을 모르고 잘못된 원인을 부등켜 안고 있는 경우가 더 많더라) 이것이 저것 때문에 아는데도 괴롭다면, 그건 그 사람이 어리석다고 할 수 있다.

 

 카밀라는 자신의 현재를 이해하지 못한다. 현재를 이해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 이전의 사건들을 하나씩 알아간다. 현재보다 선행한 입양에 대해 알아보다 입양보다 선행한 친모의 삶까지 알게된다. 오직 주변의 이야기를 주워 듣고 추측할 수 밖에 없는, 친모와 카밀라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존재하건만 그 노력만으로 카밀라는 친모는 물론 자신의 삶마저 껴안을 수 있게 된다. 그 과정을 보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심연을 건널 수 있는 '날개'가 아닌 심연 너머의 존재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 심연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

 

카밀라 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최근 재미있게 본 동백꽃필무렵이 떠올랐다능. 동백이 용식이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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