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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첫 인상은 별로였다. 내 주변의 모든 이들이 극찬을 하던 책 상실의 시대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두 번 다시 이 작가의 책은 읽지 않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소설을 이해할 수 없으니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하루키의 초기작품인 '양을 쫓는 모험'은 조금 다르다는 추천을 받고 읽어보게 되었다. 그리고 결론은 와우 하루키가 이런 사람이었어? 라는 감상이 남았다.
이 책은 제목대로 양을 쫓는 모험이다.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는 이유로 부인과 이혼을 한 나는 그 뒤 귀가 예쁜 여인을 만나게 된다. 그러던 중 어느 검은 양복 입은 남자로부터 양을 찾으라는 명령 아닌 명령을 받게 된다. 양이 무엇인지 제대로 설명을 받지 못했지만, 나는 강압적인 검은 양복 입은 남자로 인해 마지못해 그가 말하는 양을 찾아 여자친구와 떠나게 된다. 우여곡절끝에 양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는 친구 네즈미(쥐)가 있는 목장을 찾아낸다. 그 곳에 도착한 날 여자친구는 나를 떠난다. 그리고 나는 그 곳에서 지내고 있는 양사나이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후 양을 품고 자살한 네즈미를 만나게 되고, 양의 정체 또한 깨닫게 된다.
아주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는 소설이지만, 이 소설이 갖는 비유와 상징은 실로 엄청나다. 함축적인 의미 때문에 소설이 아닌 조금 긴 시를 읽은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양을 쫓는 모험은 모험이 아닌 우리네 인생으로 볼 수가 있다. 그러면 양이라는 것을 어떤 '욕망'이라는 것으로 볼 수 있어진다. 양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나, 그리고 양을 쫓고 싶지도 않았던 나는 검은 양복 입은 남자로부터 강제적으로 양을 쫓게 된다. 양을 원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양을 쫓게 된 것이다. 그러한 삶을 살고 싶지 않지만, 사회라는 것이 나를 내몰때가 있다. 욕망, 특히 부나 명예같은 물질적인 욕망을 쫓게 만드는 것이다. 물질적인 것만을 위해 내달리다 보면 정신적으로 소중했던 사람이라던지 꿈(귀여인)을 잃기도 한다. 그러한 사회속에서도 네즈미처럼 순수함을 간직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욕망에 이끌리기보다 그 욕망을 품고 자신을 희생시키더라도 순수함에 가치를 두는 것이다. 그런 순수함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양사나이처럼 시류에 따라가지 않아 도태되고 우스꽝스럽고 모자라보일 수 있다. 나는 결국 양을 쫓는 모험을 끝내고 따분함으로 가득찬 평범한 세상으로 돌아온다. 따분할 지언정 그 것은 나의 세계이다.
이 책이 쓰여진 시대를 바탕으로 본다면 양은 '자본주의'일 것이다. 마르크스 주의를 주장하고 있지는 않는 나이지만 그렇다고 자본주의에 내던져 지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거대한 흐름속에서 상실되어 가는 인간성(네즈미)을 잃고 싶어 하지 않는 모습, 그와 함께 그 변화의 흐름을 관찰 하고 있는 나의 모습은 무기력해보이지만 그 흐름을 거부하고 싶은 욕구가 얼핏 내비친다.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많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이 놀랍다.
그때 나는 스물두 살을 몇 주일 앞둔 스물한 살이었다. 당분간 대학을 졸업할 가망은 없고, 그렇다고 해서 대학을 그만둘만한 확실한 이유도 없을 때였다. 기묘하게 서로 얽혀 있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나는 몇 달 동안이나 새로운 한 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있었다.
온 세상은 끊임없이 움직이는데, 나만이 같은 곳에 머물러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1970년 가을에는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이 서글펐고, 그리고 모든 것이 빠르게 바래가는 것만 같았다. 태양의 햇살과 풀 냄새, 그리고 작은 빗소리조차도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 P17)
20대의 불안정함을 겪어 본 사람은 이 문장을 온전히 이해 할 것이다. 대학 생활 이전에는 '자신의 삶' 이라는 것이 없다. 크게는 삶의 방향성, 목표는 가정에서 설정해주며 작게는 매일매일의 삶은 학교에서 설정해준다. 그렇게 20년을 살다가 대학에 가는 순간 우리는 '자유로운 삶'에 내던져진다. 하루의 일상은 물론이거니와 지금으로부터의 삶을 책임져야 하는 때가 온다. 하지만 갑자기 사라져버린 기준으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부터 오는 불안은 사람을 일시적으로 무기력하게 만들고,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에 초조해진다. 양을 쫓는 모험에 내던져지기 쉬운 상태가 되는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제대로 동화될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주량이 늘어남에 따라 거기에 미묘한 오차가 생기고, 그 미묘한 오차는 이윽고 깊은 골을 만들게 되었다. 그의 착실함과 호감이 너무나 앞질러가서 그 자신조차도 따라잡을 수 없게 되고 만 것이다.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일을 흔히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예민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그는 잃어버린 것과 다시 만나기 위해 보다 깊은 알코올의 안개 속을 헤매기 시작했다. 그리고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P88)
알콜중독으로 넘어가는 친구의 상태 묘사 같지만 사실 이 것은 양을 쫓게 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한 두잔 마시는 술에 언제 취하는지 알 수 없게 되듯이, 사회적인 압력에 굴복하는 나 그리고 변화의 흐름에 떠밀려 가는 나를 그 속에서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술꾼이 음주 중 자신이 얼만큼 술이 취했는지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삶속에서, 객관적으로 나를 바라보고 인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술주정뱅이와 다를바 없는 모습인 것이다.
"마찬가지야. 우리가 마가린을 먹든 안 먹든 결과는 마찬가지라고. 점잖은 번역 일이나 엉터리 마가린 광고 카피나 근본은 마찬가지야. 아닌게 아니라 자네 말처럼 우리는 실체가 없는 말을 해대고 있지. 하지만 실체가 있는 말이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거지? 이것 보라고, 성실한 일 따위는 아무 데도 없는 거라고. 성실한 호흡이나 성실한 오줌이 아무 데도 없는 것처럼 말이야."(P95)
사고와 언어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비트겐슈타인이 생각나는 문장이다. 작가는 양을 쫓는 모험에 내던져진 우리에게 이런 관념적인 철학논쟁을 하는 것이 순진하다고 여기는 걸까. 아니면 그런 모험 속에서도 우리는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이러한 질문을 해야 한다고 말을 하는 것일까.
그러나 이 것은 아무래도 좋다. 도넛의 구멍과 마찬가지다. 도넛의 구멍을 공백으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존재로 받아들이느냐는 어디까지나 형이상학적인 문제이고, 그 때문에 도넛의 맛이 조금이라도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P116)
친구와의 대화 때와는 달리 이제는 형이상학적인 문제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물론,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그저 말일 뿐이오. 말을 아무리 늘어놓는다 해도, 선생님이 품고 계셨던 의지의 형태를 당신에게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내 설명은 나와 그 의지 사이의 관련을 또 다른 언어적인 관련으로 나타낸 것일 뿐이오. 인식의 부정은 또한 언어의 부정과도 관련 있는 거요. 개인의 인식과 진화적 연속성이라는 서구 휴머니즘의 두 기둥이 그 의미를 잃는 거지. 존재는 개체로서 있는 것이 아니고 혼돈으로서 있소. 당신이라는 존재는 독자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저 혼돈일 뿐이야. 나의 혼돈은 당신의 혼돈이기도 하고, 당신의 혼돈은 나의 혼돈이기도 하지. 존재가 커뮤니케이션이고, 커뮤니케이션이 존재인 것이오."(P216)
개인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그렇기에 사회로부터 영향을 받고 사회에 영향을 준다는 이야기를 참으로 복잡하게 이야기 한 것 같다.
책을 읽고 생각해본다. 양의 힘을 쫓는 검은 양복의 사나이가 될 지 양을 품으며 순수함을 지키고자 하는 네즈미가 될 것인지 말이다. 다행히도 우리는 어떤 쪽을 선택하든 그럴싸한 변명을 내세울 수 있다. 힘을 얻게 된 후 강자의 논리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고, 인간성을 내세우며 존엄성을 지키는 고결함을 강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옳고 그른 것이 아닌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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