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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불친절한 감상자

영화 버드 박스 Bird Box

by 여름햇살 2019.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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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의 버드박스가 평이 좋아서 관람했다. 관람 후 첫 감상은 스릴러면적으로는 좋았으나, 안에 담겨져 있는 메세지는 얕다였다. 뭐랄까,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로 영감을 받았으나, 긴장감만 줬다고나 할까. 그런데 겁쟁이인 나는 토요일에 영화를 본 이후로 계속해서 버드 박스를 생각했다. 아니 생각했다기보다는 그 무서운 분위기가 나를 지배했다. 이거 원 스릴러 영화를 보기 위해서 해병대캠프가서 담력이라도 키워와야 되는걸까.


그래서 본의 아니게 계속해서 영화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생각하다보니 꽤 괜찮은 소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스릴러적인 요소만 강화된 스릴러 영화라고(악령의 존재에 대해서 제대로 이야기를 해주지 않으니) 생각했다. 그런데 감독의 의도야 어쨌건 내가 생각해보고 싶은대로 해야지 라는 마음과 함께 그 정체 모를 악령이 뭘까를 고민하다보니 영화가 흥미로워지는 것 아닌가. 영화와는 상관없이 이 순간에 내가 왜 영화보다 책을 선호하는지 알게 되었으니, 이건 의외의 소득이었다. 책은 한권을 읽더라도 몇일에 걸쳐 읽으니 책을 읽지 않는 시간도 사실은 책을 읽는 시간에 포함되는데(그것에 대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니깐), 영화는 2시간만에 끝나 버리니깐 책보다 생각할 시간이 짧아서 이해를 잘 하지 못해 감명이 크지 않았던 것이다! 오우, 앞으로 영화를 보면 몇날 몇일을 생각하는 버릇을 들여야지.


 보이지 않는 악령, 그리고 사람들을 자살로 몰고가는 그 특징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 보이지 않는 악령을 피하는 방법은 오직 눈을 가리는 것 뿐이고,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건물 내부로 숨어 들고, 천과 손으로 눈앞을 가린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그 존재는 가끔씩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를 사용하여 눈을 뜨게끔 유혹하기도 한다.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그 악령이 어떤 존재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사실 악령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다) 


자살이라는 말을 들으면 대한민국이 떠 오른다. 많은 한국인들이 자살을 하는 이유는 스스로가 불행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니깐 무언가를 본다는 행위가 자살을 유발하고, 악령으로 묘사되는 그 무언가는 그들이 원치 않는 무언가, 스스로를 자살하게끔 만들고 싶은 희망없는 사회가 될 수 있겠다. 그 희망없는 상황속에서 사람들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의 존엄섬을 포기하고 눈을 가린 삶을 유지하는 방법이다. 그 악령을 마주 할 수 없는 삶은 비참하다. 목숨을 걸고 생존에 필요한 음식을 구하러 눈을 가린채 밖을 나가야하고, 집 내부에서는 악령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용히 지내야 한다. 그들의 삶은 그 어떤 것도 없어 생존만을 위한 삶이다. 불행하다고 여기는 현대인들이 여기는 바로 그 모습 그대로 말이다. 그런 생존을 위한 삶을 유지 하는 그들에게 톰의 대사는 의미 심장하게 다가온다. "인생은 보이는게 다가 아냐.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꿈꾸는게 인생이야" 영화를 보는 내내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한다. 매일을 생존여부에 대해 두려워하며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 나을지 아니면 차라리 악령을 그대로 마주하고 자살해버리는 것이 나을지 말이다. 


그런데 악령을 마주하고도 죽지 않을 수 있는 존재가 있다. 바로 사이코패스들이다. 그들은 악령을 보며 아름답다고 한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사람들 모두 마주해야 한다고, 눈을 가린 일반인들을 눈뜨게 만들고 자살로 몰고 간다. 여기에서 악령이라는 것이 사실 우리의 한 기준일 뿐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니깐 악령이란 것이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 보이지 않는 존재를 인정할 수 없고 견딜 수 없는 자만이 자살을 하는 것이다. 이로써 옳고 그름을 가르는 시비분별의 문제를 생각해 보게 된다.




그래서 영화 마지막에 등장하는 시각장애인들의 공동체는 감독의 결론이 된다. 원래부터 맹인이었던 그들에게는 사이코패스와 다른 방식으로 악령의 존재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바로 그들에게는 그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들이 그것을 감각할 수 없으니, 존재를 인정할 수 없다. 그러니깐 사람들이 끔찍하게 여기는 그 것이 실제로는 끔찍하지 않는 것이다.


 존재론적인 문제로 생각해본다. 그러니까 이 것은 누군가에게는 영향을 미칠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영향을 미칠 수 없다. 그말인 즉슨 이것은 실체가 아닌 사람들의 관념속에 있다는 것이다. 정상과 비정상, 장애와 비장애로 구분짓는 비장애적 정상인의 마음에 있는 것이고, 그것들이 그들을 존재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비정상으로 분류될 것이라는, 그리고 장애인으로 분류 될 것이라는 그 공포가 우리를 폐쇄적인 삶으로 몰고 가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본다. 그러니까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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