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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모임 선정도서로 읽게 된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아마 이렇게 강제성(?)이 없었더라면 읽지 않았을 것 같다. 왜냐, 소설 중반부까지 딱히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담배연기와 거리의 풍경, 바다와 햇살 등에 대한 묘사로 소설의 풍경이 시각적으로 다가왔던 것 외에는 내용 자체는 그냥 평범해보였다. 그러다가 이 소설이 왜 유명한지 깨닫는 딱 한 장면이 있었다. 뫼르소가 자신을 가르치려 드는 신부에게 분노를 표출했던 장면에서 나의 내면에서 카타르시스를 느꼈던 것이다. 아, 소설이란 것은 이런 것이구나를 깨달은 것은 이때가 처음이라 이방인은 딱히 재미가 없었어도 나에게 꽤 강하게 그리고 오래동안 지속될 것 같다.
"아닙니다. 형제님." 그는 내 어깨에 손을 얹고는 말했다. "나는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마음이 굳어 있기에 그것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위해 기도할겁니다."
그때,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안에서 뭔가가 폭발했다. 나는 꿱꿱 소리 지르기 시작했고, 그를 모욕하며, 기도하지 말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사제복 칼라를 움켜쥐었다. 나는 내 가슴속에 있는 모든 것을, 환희와 분노의 울부짖음으로 그에게 쏟아부었다. 그는 너무나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은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확실성은 여자 머리카락 한 올의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 그는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기 때문에 살아 있다고조차 확신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나는 빈손에 공기를 쥐고 있는 듯 여겨진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에 대해, 모든 것에 대해, 그가 확신하는 것 이상으로, 나의 삶과 다가올 죽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단지 그것밖에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그것이 나를 움켜쥐고 있는 것만큼 그 진실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었다. 나는 옳았고, 여전히 옳았으며, 항상 옳았다. 나는 이런식으로 살아왔지만 다른식으로 살 수도 있었다. 나는 이것을 했고 저것은 하지 않았다. 내가 저 다른 것을 할 때 어떤 것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것은 마치 내가 이 순간과 이 작은 시작을 위해 이 모든 시간을 기다려왔던 것처럼 나를 정당화시킬 것이다. (P160-161)
너무 길어서 타이핑을 멈추었지만(...) 160에서 162 페이지에 서술된 뫼르소의 내면에 나는 공감하고 또 공감했다. 그리고 여태 쿨한척 버텨왔던 내 마음의 벽이 무너지면서 사실 나도 이렇게 한 번은 울부짖고 싶었다고 내게 솔직해졌다. 뫼르소처럼 나도 현대 사회에서 표준화된 삶과는 멀리 떨어진 이방인이다. 그리고 그런 삶으로 인해 타인들의 판단에 대해 마냥 "괜찮아 난 이래"라고 반응은 하지만 사실 100% 괜찮을 리는 없다. 그렇게 사회에서 그 사회의 구성인에게 기대하는 특성과 나 개인이 갖고 있는 고유성이 화해하지 못하고 서로 다투는 그 상황, 그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며 매일을 견뎌내고 있는 나의 현재와 울부짖는 뫼르소를 보며 위안을 받은 것이다.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개개인은 자신 외의 모든 개체에 대해 단편적으로 결론을 내리고 정의내리는 경향이 있다. 상대방의 역사를 모두 알지 못한 채, 자신이 입수한 정보만으로 상대를 규정한다. 사실 이 것은 당연하다. 이 복잡하고 빠르게 흘러가는, 처리해야 할 정보가 넘쳐나는 이 사회에서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알아보고 공정한 판단을 내릴 시간적인 여유가 없는 것이다. 내 삶이 편해지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단 몇가지의 정보로 규정내릴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규정은 내가 살아오며 습득한 경험과 규율, 지식을 기반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니깐 인간이란 존재는 나라는 사람을 기준으로 상대방 그리고 사회를 판단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나를 마음대로 판단하는 것은 상대방의 자유다. 하지만 그들의 자유가 하나둘씩 모여서 나를 갉아 먹는다. 나는 나로서 존재하고 싶은데, 그들이 드민 잣대가 촘촘한 사회에서 살다 보면 어느 순간 나 스스로가 그들의 잣대로 나를 평가하게 되는 시점이 온다. 나 진짜 잘 못 된걸까? 그렇게 되면 나는 나로서 존재할 수 없게 되며, 그 지점에서 타인의 자유는 타인을 향한 폭력이 된다. 내가 어떻게 말하고 생각하든지 내 자유야 라고 외치는 미성숙함이 왜 존중될 수 없는지 까뮈는 그의 소설로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자신이 어긋났음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며 스스로를 속이며 주류에 편입이 되는 것이 첫번째, 그리고 부러질지언정 끝끝내 스스로를 잃지 않는 길을 택하는 것이 두번째이다. 아마도 이 소설이 충격을 안겨다 주었던 것은 많은 이들이 선택할 수 없는 그 두번째를 선택한 이를 그려내고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애시당초 처음부터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부터가 어려운 선택이니 말이다. 이렇게 하기 힘든 선택을 했지만, 체포 이후 재판과정 내내 수동적이던 뫼르소의 모습을 생각해본다. 어쩌면 소설이 시작되기 전의 뫼르소는, 타인과 세계와 너무나도 다른 자신의 모습을 끝없이 설명하려 들고 이해받고자 노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끝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경험들이 축적되어, 나를 타인에게 설명하려하는 의지조차 없어진 상태에서 소설이 시작된 것은 아닐까. 이해받지 못했지만 자신을 버릴 수 없었던 이방인 뫼르소. 그를 보며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에 대한 생각 또한 해보게 된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규정들이 지구에 존재하는 전 인류 모두가 동의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쉽게도 우리 개개인은 너무나도 다르다. 그럼에도 그 와중에 같은 의견을 공유하는 다수와 소수로 분류되어지며, 다수는 편리함과 정의라는 이유로 소수를 차별하거나 벌을 내리기 쉽다. 성숙하지 않은 사회일 수록 그런 경향이 강하다. 그러면 이걸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본다. 지금 당장 변화의 결과를 보겠다는 욕심을 내려 놓고, 작은 것부터 하나씩 해내가는 삶을 지향해본다. 타인이 나를 사회의 잣대로 재단하고 규정할지언정, 나는 타인을 그렇게 대하지 않으며, 상대방의 포용력을 넓히기 위해 애정으로 곁에 있어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만큼만, 하지만 꾸준히 사회가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이 것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은 희생이 아닌 사랑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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