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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불친절한 감상자

책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by 여름햇살 2019. 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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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국내도서
저자 :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 / 이재룡역
출판 : 민음사 2009.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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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에게 영감을 준 사람을 밝히는 것이 소설가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 것이라고 짐작한다. 사적인 자리에서야 상관없겠지만, 자신의 작품에서,  그것도 행간에 은은하게 숨겨진 것이 아니라 대놓고 언급을 하는 소설가는 없었다. 왜냐면 그들은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A는 B이고 B는 C다 라고 콕 찝어 알아듣기 쉽게 주장을 내세우는 논설문이라면 레퍼런스는 필수이겠지만, 각종 은유와 상징으로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그들에게 그런식의 서술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특이하다. 소설의 첫 줄에 니체의 영원 회귀가 언급이 되기 때문이다. 밀란 쿤데라는 자신의 소설이 이 니체의 영원 회귀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공표하고 싶었던 것이다. 제발 이 소설을 영원 회귀와 연결시켜 달라고 애원하는 듯 하다. 그래서 독자들은 평생 관심도 없는 니체의 철학에 관심을 갖고, 그가 말한 영원 회귀가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연애소설로 읽어도 무방할 이 소설에 영원 회귀의 잣대를 어설프게 들이밀고 머리가 빠지게 공부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아, 지독하도록 얄팍하고 가벼운 나의 교양수준을 참을 수가 없구나.


 영원 회귀는 지독하게 무겁다. 영원회귀를 나로 예를 이러하다. 85년에 태어나고 학창시절에 삽질하고 나이들어 찌질대다가 어느 순간 죽는다. 그리고 다시 85년에 태어나서 똑같은 방식으로 학창시절에 삽질하고 나이들어 찌질대다가 다시 죽는다. 그리고 다시 85년에 태어나고.. 이렇게 목적도 없고 끝도 없는  삶의 반복을  영원히 지속하는 것이 영원 회귀이다. 언제 시작했는지 알 수도 없고 끝나지도 않는 이 삶의 중압감이란. 만약 삶이 니체의 말처럼 영원히 회귀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니체와 달리 자신의 인생이 1회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1회성의 삶을 영원 회귀보다도 더 무겁게 살고 있다. 그들의 순간순간은 매우 무겁다. 지금의 선택과 지금의 행동은  1분 뒤, 1시간 뒤, 1일 뒤, 1달 뒤, 1년 뒤, 10년 뒤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렇기에 매 순간 최선의 선택을 내려야 한다고 여긴다. 잘못된 선택은 잘못된 결과를 낳고 옳은 선택은 옳은 결과를 가져오니 말이다. 삶을 이런 태도로 살다보니, 매일매일이 무겁다. 


하지만 영원 회귀의 삶을 산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매순간의 내 선택의 무게는 가벼워질 수 밖에 없다. 나는 몇 백번 아니 몇 천번을 이 선택을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며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막 살겠다고 마음 먹는 것은 곤난하다, 그건 다른 논리다) 매 순간 최선의 선택을 하려고 노력이야 하겠지만, 심적인 부담감은 전자와는 비교할 수 없이 가볍다. 지독하게 무거운 영원 회귀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매일 매일을 가볍게 만들어준다. 이정도면 니체는 철학자가 아니라 마법사가 아닌가.


 그럼 다시 우리는 왜 삶이 무겁게 다가오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니체에 따르면 삶이란 이다지도 가볍게 살 수 있는 것인데, 무엇이 우리를 이다지도 무겁게 한단 말인가. 바로 욕망이다. 선택의 무게는 욕망의 무게에 비례한다. 결과가 어떻게 되어도 상관 없을 때에 우리는 쉽게 결정하고 행동하게 된다. 결과가 나의 삶을 좌지우지 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반면 먹고 사는 문제가 달려 있을 때에 우리는 신중해진다. 그 것이 나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무거운 욕망, 좋은 결과를 위해 신중한 선택을 내리는 행위가 항상 내게 좋은 결과만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다. 나는 진심을 다해 사랑하고 부인과 이혼을 결심할 지언정 내연녀는 말 한마디 남기지 않고 나를 떠날 수 있는 것이고, 내가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사회는 나를 보며 반공분자라 낙인찍고 나를 내 천직에서 끌어내리기도 한다. 그렇게 고심하게 내린 선택마저도 내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 인생인 것이다. 그러면 이 욕망의 무게도 좀 덜고 훌훌 가볍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밀란 쿤데라에 따르면 그것은 매일같이 나의 키치를 깨부수는 것이다. 우리는 각자의 인생 정답을 갖고 있다. 어느 정도의 돈을 모아야 한다던지, 몇 명의 친구가 있어야 한다던지, 어느 정도의 사회적 지위는 올라가야 한다던지 등등 각자가 바라는, 아니 더 솔직하게 말하면 인생에서 <그래야만 하는 것들>을 정해놓고 살고 있다. 그것들이 허상이라는 알고 나면, 우리는 키치라는 두꺼운 옷을 벗고 가벼워질 수 있다. 우리는 삶에서 발생되는 우연의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며 우연을 운명으로 바꾼다. 그리고 그 우연에 근거한 운명들로 <그래야만 하는 것>들을 만든다. 시간이 지나서 그 우연의 순간들은 잊혀지고 운명과 <그래야만 한다> 만 남는다. 그래야만 하는 키치들은 내가 만들었는데, 이제는 그 키치들이 나를 조정하게 되는 것이다. 


키치들에 그리고 결과에 내가 좌지우지 되지 않는다면 나는 그 어떤 삶을 선택해도 괜찮다. 남에게 인정받을 만한 사회적 지위, 남들만큼 아니 어쩌면 남들보다 더 풍족한 경제적 여유를 바라는 그 욕망이 배제되면 나는 의사가 아닌 유리창닦이의 삶을 선택할 수도 있고 200명을 만나는 바람둥이의 삶을 선택할 수도 있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우스꽝스럽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런데 자신들이 만들어낸 무거운 관념속에서 답답해하는 스스로의 모습이 우스꽝스럽다는 것은 이해하지 못한다. 인생에서 그래야만 하는 것은 없다. 옳고 그른 것을 그 누가 판단해준단 말인가. 중세 시대에는 신이 그 것을 해주었지만, 신을 버린 현대의 인간이 여전히 중압감에 시달리는 것은 황당하다. 우리는 누구도 토마시나 테레자, 사비나와 프란츠의 삶을 옳고 그름으로 판단 내릴 수 없다는 것을 소설에서 이해했다. 그렇기에 밀란 쿤데라는 이 소설을 통해 이렇게나 다면적인 인생을 두고 아직도 기다 아니다를 따질꺼냐고 묻는 듯 하다. 가볍게 살지만 무거움에 끌리는, 무거움 속에서도 가벼움을 찾고자 하는 인간, 그리고 그 반복의 합으로 이루어진 인생, 그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된다면 오늘 하루는 가볍게 살수 있으려나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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